고조선의 기원

 


고조선의 기원




1. 하가점하층문화(샤자뎬하층문화) 설 : 


기원전 2200년경에 시작해서 기원전 1800년경에 판축토성, 석성 짓고 작은 부락국 세우고 시골 여러개 혹은 수십개 거느리고 살며


청동기 석기 병용하며 수렵과 목축과 채집과 농경을 동시에 섞어 하며 


다양한 종류의 화려한 채색 지그재그 무늬 세 발 달린 부피 큰 토기에 , 하夏,상商나라의 '새 주둥이 + 세 발 달린 청동 술잔'의 원조 흙그릇 버전을 쓴


문화 


기원전 1600년경에 기후 재앙으로 뿔뿔이 흩어져 망함. 주민 일부가 만주 요동의 고대산 문화('숙신'으로 추정)에 흡수됨.


하가점하층문화 유물 중에 혀 내밀고있는 구름 무늬 옥기가 있는거같음. 홍산문화 유물인데. 하가점하층까지 이어져옴.


홍산문화는 기원전 3500~기원전 3000년경인데.


기후 재앙으로 망해 뿔뿔이 흩어짐. 주민 일부가 남아서 새로운데서 이주해온 주민들과 연합해서 하가점하층문화 세운걸수도.




중국 학계에선 하가점하층문화가 중국의 이리두 문화(하나라),이리강 문화(상나라) 형성에 영향 미쳤다는 연구들이 있음.


한국 학계 일부에선 단군조선 아니냐는 연구들이 있음. 역사스폐셜에도 나옴.




내 생각엔 은나라의 조상 유융씨(有戎氏)가 하가점하층문화가 아닐까싶다.


유有는 선사 시대의 나라에 붙이는 돌림자 느낌이고


융戎이 중요한데. 북방족이란 뜻이다.




2. 요서 홍산 지역 하가점상층문화의 한 유형 요서 조양시 십이대영자 비파형동검 문화 혹은 십이대영자의 멀티인 요동 심양시 정가와자 비파형동검 문화 설 : 


 하가점상층은 기원전 9세기 ~ 기원전 4세기 (산융,고죽,영지.  중국,한국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


 하가점상층문화는 비파형동검,공병식동검,유병식동검을 만듬.


비파형동검은 주로 십이대영자 유형. 공병식동검은 하가점상층 본진인 홍산,하가점 일대.


유병식동검은 고죽,영지가 있는 하북성 노룡현 부근. (산해관 부근)




 십이대영자는 기원전 8세기~기원전 6세기 (산융의 한 유형인 '도하'로 추정됨 : 책사풍후 설.)




하가점상층문화의 구성 인원은 산융(山戎), 고죽 , 영지 ,도하 인데.


고죽,영지가 상나라(은나라) 유민과 요서 토착 원주민이 섞인거라면, 


산융은 하가점하층문화 주민(유융씨有戎氏)가 기후 변화 사태로 인해 몽골이나 만주 요동 고대산 문화(숙신)로 도망갔다가


다시 와서 하가점상층문화가 된게 아닐까. 


실제로 하가점상층문화의 형성에 만주 요동 고대산 문화가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가 있다. 


산융(山戎)이란 이름은 요서 홍산 산 지대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고 산융이란 이름이 붙었다고한다.






 정가와자는 기원전 6세기~기원전 4세기 (오강원 교수는 고조선이랑 관련있다고 봄)


 정가와자는 십이대영자 집단이 통으로 요동으로 이사온거라고 함.


 정가와자랑 동시대에 요서에서는 '동호(東胡)'로 추정되는 동대장자 문화 집단이 전성기를 누림. 비파형동검을 씀.


 


요동 정가와자는 청동단추로 도배한 가죽 장화에 비파형동검이 특징적인데. 


요서 동대장자는 중국에서 훔쳐온듯한 고급 청동 제사 용기들이나 중국식 검이나 창이 좀 출토됨. 


 정가와자,동대장자 둘 다 비파형동검이 주 무기다. 


정가와자,동대장자 둘 다 기원전 4세기 말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입으로 멸망한다. 


동대장자는 동호.  정가와자는 고조선. 대충 이렇게 보는게 학계의 대강의 정설이라 할 수 있다.






사마천 사기 오제본기의 순 임금편과 공자의 대대례기를 보면 


중국의 동북쪽에 산융,발,식신(숙신)이란 부족이 있다고 적혀있다.


사마천 사기 오제본기는 공자의 대대례기를 ctrl c v 한 것이므로 


공자의 대대례기에만 집중해서보자.


공자의 대대례기 역시 주나라 시절 주변 세력들 배치도를 보고 공자가 뇌피셜로 오제 시대 시절 세력 배치를 망상했을거라 본다면 


정말 그 세력 배치를 기원전 2100년인 순 임금 시대로까지 거슬러올라갈수는없고 그냥 기원전 10세기~기원전 9세기 주나라 시대 세력 배치라 봄이 맞다.




그렇다면 기원전 10세기~기원전 9세기 주나라 시대에 만주의 서쪽 요서에는 산융. 그리고 만주의 요동에 숙신은 물론 '발'이란 부족도 있었던 것인데.


'일주서'란 기록을 보면 주나라 시대 주변 부족들이 주나라로 조공 온 기록이 있는데.


이 일주서란 기록에 '발'이란 부족에 대해 적혀있다. 발 부족은 사슴처럼 발이 빠른 야만족인데. 위치가 대충 중국의 동북쪽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대충 요동반도의 끄트머리 쯤 대련 지역일거같다.


실제로 '누상.강상 무덤'이란 비파형동검 + 순장(?) 집단이 이 지역에 있다. 


발=부루=비류 발음이 비슷한데. 


비류는 졸본부여의 조상이고 , 부루는 부여의 조상으로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나온다.


'부여'란 이름도 만주어 puhu(푸후)가 사슴이란 뜻인 점과 부여의 수도의 산 이름이 녹산鹿山 즉 사슴 산이란 뜻임을 보면 


사슴과 관련있을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슴처럼 발이 빠른 야만족 '발'과 뭔가 비슷해보인다. 




근데 이 얘기를 왜 하냐면 [관자]란 기록에 기원전 7세기 중국 산동반도의 제나라란 나라가 발,조선과 교역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발과 조선을 따로 따로 볼건지


혹은 발,숙신이 곧 발,조선인건지. 즉 숙신=조선이 되는건지. 


조선을 요서,요동을 일컫는 지역 이름으로 본다면, 


'발'이란 부족은 요서에도 요동에도 흩어져 분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서기 3세기 후반 중국 삼국지 시대에 적힌 [삼국지 동이전] 기록에 인용된 [위략]이란 기록을 보면


기원전 5세기 중국에서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가 시작되고 중국 주나라의 제후들이 주나라 연맹에서 탈퇴하고


개나 소나 나도 왕이요 나도 왕이요 하고 왕을 칭할 무렵, 


고조선도 난 기자의 후손이다. 나도 왕이다하며 왕을 칭하고 중국 주나라로 쳐들어가기 위해 먼저 베이징의 연나라를 치려고해서   


연나라,고조선이 서로 대립했는데. 화친을 맺고 끝냈는데


결국 기원전 4세기 말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보내 복수 목적으로 침략을 하여 고조선은 영토 2천리를 따먹히고 


요동의 만번한(안시성 근처)으로 국경선이 새로 그어져서 국력이 쇠약해져가기 시작했다고 나온다.


 


사마천 사기에서는 연나라와 동호의 대립만 주로 기록되어있고 조선은 동호를 따먹은 후 그냥 덤으로 밟아버린 대상 쯤으로만


취급되어있는데.


삼국지 동이전에서 조선은 꽤 연나라랑 호각을 겨룬 나라처럼 적혀있다.


정가와자보단 동대장자가 고조선이 아니었을까.




고조선이 요서가 아니라 요동이나 북한에 있었다면 뭐하러 중국 주나라로 쳐들어가려하고


뭐하러 기자의 후손을 자칭했을까


동대장자에서 중국 주나라 스타일 청동제사용기들이 출토되는건 그게 약탈물이었든 자체 제작이었듯 수입품이었든간에 


뭔가 중국에 대한 어떤 문화적 집착이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사마천 사기에는 조선이 아니라 동호가 연나라의 위협적인 라이벌로 적혀있는 것일까.


(연나라가 왕족 혹은 그에 준하는 인물인 '진개'란 자를 동호에 인질로 보낼 정도로 동호가 제법 셌다고 나옴.)




내 생각에 조선은 지역의 이름이지. 나라의 이름이 아니고 춘추시대건 전국시대건 '조선'이란 구체적인 국호를 선포한 나라는 


없었을수도 있다.


'조선'이란 구체적 나라가 등장하는건 동대장자(동호),정가와자(예맥 숙신 연합 세력?)가 연나라의 침략으로 박살난 후


연나라의 위협에 대응하기위해서 새롭게 등장한 연맹 왕국이 아니었을까.




 삼국지 동이전의 [위략] 기록은 춘추시대,전국시대 혹은 진시황 시대나 혹은 위만조선 시대에 바로 바로 적힌 기록이 아니라


후대~ 즉 삼국지 시대에 적힌 기록이다. 


즉 후손들이 조상들 시절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과 전승들을 모아 적은 것이다. 그래서 사실의 전달이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


 


이 부분은 단군이 1500살을 살았다는 삼국유사,제왕운기의 기록 역시 마찬가지다.


삼국유사는 단군이 도읍한 곳이 나무잎이 안 나는 산이란 뜻의 '무엽산'이라고 적혀있다.


요서 홍산 지역은 나무잎이 실제로 안 난다.


삼국유사는 단군이 중국의 요(堯) 임금 때에 건국되었다고 하는데. 그 증거로 중국의 위나라의 기록인 '위서(魏書)'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중국에도 없고 한국에도 전해오지 않는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그렇게 인용된걸 보면 그런 기록이 아예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에 인용된 '단군고기'란 기록을 보면 단군이 태자 부루를 중국 하(夏)나라 우임금에게 보내 


우 임금의 도산 회의에 참석하게 했다고 나온다.


요 임금과의 관련이라던지, 하나라 우임금이 연 국제 회의(?)에 참석했다던지 이런 기록들은 


사대주의적 시각에서 뭔가 중국의 먼 옛날이랑 자꾸 엮여야 자부심이 살아나는 소중화적 사고 방식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만큼 우리나라의 최초 나라인 고조선의 건국 연대가 그만큼 오래 되었다는 흐리무리한 기억의 작용이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수있으며


단군이 나이 1500살을 살았다는 것도 그냥 단순 도교 신선 설화의 영향일수있으나 


오히려 이것은 어떤 왕조의 통치 연대가 신선의 장기간 수명으로 신화,전설화 되었을 가능성 역시 생각해볼수도 있어 보인다.




만주의 요동,북한,강원도 등은 신석기 홍산문화 시대엔 요서로부터 빗살무늬토기 문화를 전파받고 옥기 문화도 교류가 있었다.


하가점하층 시대에는 만주의 요동 고대산 문화와 요서 하가점하층문화가 서로 교류가 있었다.


하가점상층문화의 한 유형인 십이대영자 문화는 요동 정가와자로 이사가서 정가와자 비파형동검 문화가 되었고


고조선의 한 기원이 되었다. 


이런 여러가지들이 고조선의 형성 과정에 영향을 미쳤고 , 환웅 단군 신화라는 신화 전설의 형성에도 어렴풋한 기억의 형태로 영향을 미쳤다고 


볼수도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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