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쿠빌라이 때 백제 왕이 신하 양호를 보내 조공바쳤다. 원사 세조본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원나라 쿠빌라이 때 백제 왕이 신하 양호를 보내 조공바쳤다.
원사 세조본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테마 음악============
https://youtu.be/onpl_pH-vDw?si=lLUvCs4YzWuOOu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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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年春正月甲午,陝西行省以開州新得復失,請益兵,敕平陽、延安等處簽民兵三千人,山東、河南、懷孟、潼川調兵七千人益之。丁酉,申嚴平陽等處私鹽之禁。壬寅,立茶速禿水十四驛。癸卯,敕修曲阜宣聖廟。乙巳,百濟遣其臣梁浩來朝,賜以錦繡有差。禁僧官侵理民訟。辛亥,封安肅公張柔為蔡國公。以趙璧為樞密副使。立諸路洞冶都緫管府。癸丑,敕封昔木土山為武定山,其神曰武定公;泉為靈淵,其神曰靈淵侯。簽蒙古軍,戶二丁三丁者出一人為軍,四丁五丁者二人,六丁七丁者三人。乙卯,高麗國王王禃遣使來朝,詔撫慰之。戊午,立提點宮城所。析上都隆興府自為一路,行緫管府事。立開元等路轉運司。城大都。]
"4년 봄 정월 갑오일에, 산서성 행정부는 개주에서 새로 얻은 지역을 다시 잃었다고 보고하며 병력 증강을 요청했습니다. 평양, 연안 등지에서 민병 3천 명을, 산동, 하남, 회몽, 통천에서 병력 7천 명을 추가로 동원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정유일에, 평양 등지에서 민간인의 소금 밀매를 엄격히 금지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임인일에는 차속두수의 14개 역을 설립했습니다. 계묘일에는 굽우흥성묘의 수리를 명령했습니다. 을사일에는 백제가 그의 신하인 양호를 조정에 보내왔고, 차별적으로 비단과 자수를 하사했습니다. 승려 관리가 민간 소송에 개입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신해일에는 안숙공 장유를 채국공으로 봉했습니다. 조석을 승비부사로 임명했습니다. 각도의 동연도총관부를 설립했습니다. 계축일에는 예전의 무토산을 무정산으로, 그 신을 무정공이라 하고, 샘을 영연으로, 그 신을 영연후라 명명했습니다. 몽골군을 모집하여, 2명 또는 3명의 세대당 한 명씩 군대에 편입시켰습니다. 을묘일에는 고려의 왕 왕족이 사절을 보내왔고, 위로와 격려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무오일에는 궁성 지역의 관리를 담당할 기관을 설립했습니다. 상도 롱흥부를 분리하여 독립된 도로 만들고, 총관부의 업무를 수행하게 했습니다. 개원 등의 도로에서 운송을 관리하는 사무소를 설립했습니다. 대도시를 건설했습니다."_원사元史 세조본기世祖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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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학계에선 이 백제 왕을 탐라국 왕이라고 보지만 탐라 왕이면 탐라 왕이지
왜 백제 왕이라고 하나?
내 생각은 다르다.
전라도 호족이 자칭 백제 왕이라고 하며 사신을 보낼 정도로, 아직 호족의 기세가 드셌다는 것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보면 고려 말의 왜구도 70~80%는 고려 사람이라고 나옴.
조선 태종이 모든 섬들을 전부 민간인 거주 금지 구역으로 만들고 울릉도는 진짜 완벽히 거주 금지 구역으로 만든 것도
왜구에 빌붙는 백성들 때문.
조선 태종이 백성이 사또 고소 금지못하게하는 쓰레기 법 만든 것도 아랫것은 윗 사람에게 개기면 안된다고 가르치는 성리학 이념에 따라
호족을 모조리 패버려서 고분고분한 아전으로 만들고, 백성들 역시 무조건 중앙이 내려보낸 사또에게 순종하게 한거.
근데 그렇게 하면 백성이 사또 고소 못하면 사또가 탐관오리질 해도 막을 방법이 없으니 백성이 하소연이라도 해야하는데
무지랭이 백성이 한자 제대로 쓸줄도 모르니 이를 어쩌나 음 이참에 성리학 삼강오륜을 백성들에게 쉬운 글로 세뇌시키면 되겠네 후후하고
세종이 한글을 만듬. 그런 세종의 의도가 조선왕조실록에 세종과 신하의 대화로 어느정도 나타나있음.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던 고려 현종 때. 현종이 피난가다가 호족들에게 여러번 죽을 위기를 당했는데.
이는 아직 지방에 대해 중앙이 완벽히 장악하지 못했다는걸 보여주고,
어쩌면 호족들의 비밀 결사가 있었을수도 있고, 호족들은 자기들 마을에선 거의 왕 행세를 공공연히 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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