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의 도읍 이름이 건강建康인데.

 동진의 도읍 이름이 건강建康인데. 동진의 중심지가 장강과 회수가 흐르는 곳인데. 후당의 황제 숙종이 고려 왕건을 책봉할 때 왕건은 장강과 회수의 번성한 종족이라 함. 송나라도 고려 성종을 책봉할 때 “늘 백제(百濟)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길이 장회(長淮)의 겨레를 무성하게 하라.”라고 말함. 궁예 정권 초기 왕건이 후백제와의 해상전에서 전라도 서해 바다의 섬들 수십개와 나주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는데. 이 지역 사람들을 도자기를 열심히 만드는 도공으로 만들어서 이들이 만든 도자기를  중국에 수출함. 근데 중국 동해안 난징 일대는 백제 멸망 전에도 서기 4세기~서기 6세기 남북조 시대에 백제와 많은 교류가 있었고, 서기 7세기 백제 멸망 후에는 백제 백성들이 중국으로 질질 끌려온 후에도 백제인들이 중국 동해안가에 거주하면서 신라와 연계하여 '신라방'이 되었다고 한다.(한국의 역사학자 '김성호'가 이 분야를 열심히 연구함) 왕건과 왕건建 가문과 엄청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신천 강康씨가....  글자 합체 하면 건建 강康. 동진의 도읍 이름이다. 왕건 가문,신천 강씨는 중국에서 온 백제 유민들이 아닐까...!

근초고 당시 진씨 가문의 정체

근초고 당시 진씨(眞氏) 가문의 정체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편을 보면 근초고왕 초기 20년은 거의 사실상 진(眞)씨 가문이 다스린 거로 나오고 근초고 통치 기록은 대략 20년 정도 공백으로 되어 있다. 진씨 가문... 삼국사기 백제본기가 후대 기록이라는걸 감안할 시,  과연 근초고 초기에 '진씨 가문'이 '진씨 가문'이라 불렸을까? 근초고 통치의 후반기는 서기 4세기 후반. 근초고가 즉위한건 서기 4세기 중반인 서기 346년이다. '백제(百濟)'란 나라가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건 서기 372년 난징 정권의 황제 '사마욱'에게 조공바치는 때부터다. 그전엔 백제가 중국에 조공을 바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즉 기원전 18년 백제 1대 족장 온조 때부터 서기 346년 백제의 족장 '계'가 죽을 때까지(1.온조, 2.다루, 3.기루, 4.개루 ,5.초고 ,6.구수, 7.사반, 8.고이,9.책계 ,10.분서 ,11.비류 ,12.계 이 자들이 실제로 실존했다고 100번 양보해서...)  심지어 백제의 13대 왕인 '근초고'의 통치 후반기인 서기 372년에 이르기까지 백제는 중국에 조공을 할 정도의 추진력은 커녕 힘도 없었다는 말이 될 수 있다. 혹자는 그냥 조공을 안 바친게 아닐까? 라고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서기 3세기 후반에 적힌 '삼국지 동이전'을 보면 백제는 한자로 百濟가 아니라 伯濟라고 나온다. 이는 매우 큰 차이다. 百濟는 100+제濟이다. 엄청나게 많은 이주민들이 바다나 강을 건너와 연합해서 나라를 세웠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伯+濟라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맏 형님 되는 부족이 친히 강이나 바다를 건너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뜻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1대 왕 온조의 기록인 '온조 본기'에 따르면, 온조가 나라를 세우던 초반에는 10명의 신하들의 부족들이 연합해서 나라를 세워서 十濟라 하...

고구려는 부족의 우두머리를 패자沛者라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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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부족의 우두머리를 패자沛者라 부름. ========== 沛者(패자) : 對盧(대로)를 두면 沛者(패자)를 두지 않고, 沛者(패자)를 두면 對盧(대로)를 두지 않는다는 표현에서 양자의 지위는 상응하였던 것 같이 보인다. 양자의 起源(기원)을 對盧(대로)는 부족의 長(장)이었고, 沛者(패자)는 군사적 지도자(軍長, 군장)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분명치 않다. 『三國史記(삼국사기)』에 某部(모부) 沛者(패자)라는 기록은 있으나 某部(모부) 對盧(대로)라는 例(예)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양자가 그 원래 성격은 비슷하였으나, 뒤에 對盧(대로)는 중앙정부의 官階(관계)가 되었고 沛者(패자)는 部(부)의 官階(관계)가 되어 桂婁部(계루부) 王室(왕실)과 그 예하의 諸部(제부)간의 차등성에 따른 어떤 면을 반영하는 듯 싶다. ≪參考文獻(참고문헌)≫ 金哲埈(김철준), 「고구려·신라의 官階組織(관계조직)의 成立過程(성립과정)」『한국고대사회연구』1975. ============== // 타이라를 두면 헤이시를 두지 않고   헤이시를 두면 타이라를 두지 않는다... 음? // 요동 안시성 쪽의 요동 고조선 강물은 패수沛水라 불리고 고조선 중심지 낙랑 북쪽의 강물(청천강)은 패수浿水라 불림. 패沛나 패浿나 둘 다 발음이 똑같다. 고구려에서 부족의 우두머리를 패자沛者 라 부른 거랑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타이라... 따이 라... 띠 라... 대방帶方... 평씨平氏... 헤이 시..... ..... 패이 시....  패수... 패라.... 평나..... 평양..... 

할복 문화의 기원은 한반도에 있나?

 할복 문화의 기원은 한반도에 있나?   "헌창이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자, 종자(從者)가 목을 베어 머리와 몸을 각각 다른 곳에 묻었다."  憲昌知不免自死, 從者斷首與身各藏.  _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  >   헌덕왕(憲德王)  >   14년 3월18일 김헌창의 난을 진압하다(0822년 03월 18일(음)) 아마 신라 화랑이나 백제 담로 무사도가 기원일 듯. 삼국사기는 유교 기록이고, 삼국유사는 불교 기록이라서 잔혹한 건 가급적이면 안 적으려하니  자연스레 사무라이 자살 돌격이나 사무라이 할복하면 종자가 대신 목 베는 그런 잔악한 문화의 기원이 한반도인걸 증명할만한 기록이 거의 남지 않은 듯. ===테마 음악========== https://youtu.be/9PeluiSmHQU?si=KEfWet5FOq_qwe2M   ===================

견훤은 왜구 겐지인가

견훤은 왜구 겐지인가 삼국유사 견훤 탄생 신화 보면 야마토 정권 삼륜산 시조 탄생 신화와 비슷하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본래 이름은 원선(元善)이다. 삼국유사 견훤전에 인용된 [이비가기]란 기록에 따르면,  “진흥대왕의 왕비 사도(思刀)註 352의 시호는 백융부인註 353이다. 그 셋째 아들 구륜공(仇輪公)註 354의 아들 파진간(波珍干)註 355선품(善品)의 아들 각간(角干)註 356작진(酌珍)註 357이 왕교파리(王咬巴里)註 358를 아내로 맞아 각간(角干)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바로 아자개註 359이다. " 라는데. 견훤의 조상에 진흥대왕의 왕비 사도가 있다는건 견훤 가문이 자신들의 기원을 조작했을 수도 있는 것으로 신뢰하기 힘들다. 다만 견훤의 고조부가 파진찬 선품인데. 파진찬은 해양 무역과 관련된 관직이란다. 견훤이 후백제 정권 창업 당시 해적 능창이나 순천 해양 호족 김총을 끌어들인 것으로 볼 때 그가 해양 세력 특히 일본과 어떤 관련이... 원선(元善)의 원(元)은 일본 발음으로 '겐(Gen)'이다. 견훤... 겐훤......  아자개는 백제 근초고왕이 야마토로 보낸 승마술 전문가 '아직기'와 이름이 닮았다. 허.... 그렇다면 아자개, 견훤은 왜구란 말인가? 그렇다면 신라 수도를 불바다 피바다로 만들고 신라 왕을 강제 자살시키고 신라 왕비를 겁탈한 것도 다 이해가 된다.

원나라 쿠빌라이 때 백제 왕이 신하 양호를 보내 조공바쳤다. 원사 세조본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원나라 쿠빌라이 때 백제 왕이 신하 양호를 보내 조공바쳤다. 원사 세조본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테마 음악============ https://youtu.be/onpl_pH-vDw?si=lLUvCs4YzWuOOuHS ================ ========= [四年春正月甲午,陝西行省以開州新得復失,請益兵,敕平陽、延安等處簽民兵三千人,山東、河南、懷孟、潼川調兵七千人益之。丁酉,申嚴平陽等處私鹽之禁。壬寅,立茶速禿水十四驛。癸卯,敕修曲阜宣聖廟。乙巳,百濟遣其臣梁浩來朝,賜以錦繡有差。禁僧官侵理民訟。辛亥,封安肅公張柔為蔡國公。以趙璧為樞密副使。立諸路洞冶都緫管府。癸丑,敕封昔木土山為武定山,其神曰武定公;泉為靈淵,其神曰靈淵侯。簽蒙古軍,戶二丁三丁者出一人為軍,四丁五丁者二人,六丁七丁者三人。乙卯,高麗國王王禃遣使來朝,詔撫慰之。戊午,立提點宮城所。析上都隆興府自為一路,行緫管府事。立開元等路轉運司。城大都。]  "4년 봄 정월 갑오일에, 산서성 행정부는 개주에서 새로 얻은 지역을 다시 잃었다고 보고하며 병력 증강을 요청했습니다. 평양, 연안 등지에서 민병 3천 명을, 산동, 하남, 회몽, 통천에서 병력 7천 명을 추가로 동원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정유일에, 평양 등지에서 민간인의 소금 밀매를 엄격히 금지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임인일에는 차속두수의 14개 역을 설립했습니다. 계묘일에는 굽우흥성묘의 수리를 명령했습니다. 을사일에는 백제가 그의 신하인 양호를 조정에 보내왔고, 차별적으로 비단과 자수를 하사했습니다. 승려 관리가 민간 소송에 개입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신해일에는 안숙공 장유를 채국공으로 봉했습니다. 조석을 승비부사로 임명했습니다. 각도의 동연도총관부를 설립했습니다. 계축일에는 예전의 무토산을 무정산으로, 그 신을 무정공이라 하고, 샘을 영연으로, 그 신을 영연후라 명명했습니다. 몽골군을 모집하여, 2명 또는 3명의 세대당 한 명씩 군대에 편입시켰습니다. 을묘일에는 고려의 왕 왕족이 사절을 보내왔고, 위로와 격려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무오일에는 궁성 지역의 관리를 담당할 기관을 설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