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아노스 볼디고드
고구려의 아노스 볼디고드
태조왕은 이름이 '궁'인데 태어나자마자 눈을 번쩍 떴는데 마치 악마가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같다 느꼈는지 나라사람 들이 미워하며 죽이려하였다
_삼국지 동이전 고구려편
그러나 어머니인 태후가 섭정 하니 누구도 못 개겼다 _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편
이때에 비로소 소노부에 있던 왕권 이 계루부로 옮겨왔다고한다 _삼국지 동이전 고구려편
그래서인지 '태조太祖' 건국자에 붙여지는 시호 '태조'가 이 자에게 붙는다._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편
고구려는 5부족이 연합한 연맹이다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편)
그중 소노란 부족이 고구려 전체를 다스리는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
근데 점점 쇠약해지다가 계루부한테 왕권을 뺏겼다고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편은 적고 있다.
'소노' 부족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엔 '비류' 부족으로 나온다.
비류... 주몽의 아내 소서노의 아들이 '비류'가 아닌가?
그러고보니 소서노는 '소노'와 발음이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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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宮 그러니까 태조는 계루부 출신이다.
그의 이름 궁宮은 이름부터 궁궐이다. 그래서 이름부터 그가 고구려 연맹의 연맹장 자리가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뀌면서
새로 역사가 다시 쓰여졌다는 것을 아주 깊게 암시하고 있다.
근데 처음부터 이름이 궁궐이었을리가 있겠는가.
이건 그가 왕위에 오르고나서 주어진 이름일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그의 어렸을 때의 이름은 어수(於漱)로 나온다.
마치 미나모토 노 쿠로 요시츠네의 어릴적 이름이 우시와카마루인 것처럼
성인 이름과 어릴 때 이름이 따로 따로인 것이다.
태조왕의 아버지는 '재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재사는 '고추가'란 직위에 있었고 그는 '유리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유리왕은 고구려 1대 왕이라고 전해지는 '주몽'의 아들이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는 고구려의 2대 왕이다.
고구려 장수왕 시절 북위는 장수왕에게 고구려 역대 왕 계보를 전달받았다.
북위의 역사가 적힌 책인 『위서(魏書)』 권100 열전88 고구려전을 보면
태조왕 궁(宮)은 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 혹은 모본왕으로 비정되는 '막래(莫來)'의 먼 후손[裔孫]이라고 나온다.
위서 고구려전의 기록을 참조해볼 때, 삼국사기에서 재사가 유리왕의 아들이라는건 서로 상충된다.
뭐가 맞는걸까?
태조왕이 왕위에 즉위한건 서기 53년 11월(음력)이다.
유리왕은 서기 18년에 죽었다.
근데 [위서 고구려전] 기록은
"주몽이 죽자 여달이 왕이 되었다. 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如栗이 왕이 되었고,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莫來가 왕이 되어 부여를 정벌하니,
부여는 크게 패하여 마침내 고구려에 통합·복속되었다.註 019
막래의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이어 후손 궁宮에 이르렀다.註 021 궁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보았으므로 나라 사람國人들이 미워하였다. "
朱蒙死, 閭達代立. 閭達死, 子如栗註 017代立. 如栗死, 子莫來註 018代立, 乃征夫餘, 夫餘大敗, 遂統屬焉.註 019 莫來子孫相傳, 至裔孫宮,註 020註 021 生而開目能視, 國人惡之.
라고 적고 있다.
여달이 유리면 여율은 무휼이다. 그러면 막래莫來는 자연히 '모본慕本'이 된다.
막래莫來 모본慕本 둘 다 한자가 묘하게 비슷한 부분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달리 위서 고구려전은 동부여를 멸망시킨 자가 무휼이 아니라 모본이라고 말하고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그저 폭군,동성애자에 불과한 모본이 위서 고구려전에선 위대한 대영웅 정복자로 나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주몽(19년) , 유리(37년) , 대무신왕(27년), 민중왕(5년), 모본왕(6년) 이렇게 이어진 후 바로 태조왕으로 이어진다고 적고있지만
위서 고구려전은 "막래의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이어 후손 궁宮에 이르렀다."고 적고있다.
즉 모본에서 태조왕까지는 '대대로 왕위를 이은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왕들이 무더기로 삭제된 것이다.
삼국사기 자체에서도 그런 의심을 불러일으킬수 밖에 없는 것이 태조왕은 무려 94년동안 통치하였고 그후 죽은 것도 아니고
자기 아우 수성에게 양위를 한다 그후 태조왕은 더 살다가 나이 들어 죽었다는데.
태조왕은 대략 130년 이상 생존하였다는 것이다. 그게 말이 될리가 있겠는가.
모본왕에서 태조왕 사이의 여러 명의 왕들을 삭제하다보니 자연히 태조왕의 즉위는 서기 53년 11월(음력)으로 조정된듯싶다
그러면 태조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한게 되버리는데. 이걸 또 말을 맞추려고하다보니 어머니 태후가 섭정했다라는 식으로
대충 얼버무린게 아닐까.
그러다보니 태조왕은 130년 이상 생존하는 슈퍼 네피림이 되버린 것이다.
"태조대왕(太祖大王)註 001 국조왕(國祖王)註 002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궁(宮)이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어수(於漱)이다. 유리왕(珫璃王)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註 003 재사(再思)의 아들이고,註 004 어머니 태후(太后)는 부여 사람이다. 모본왕이 죽고 태자가 못나 사직을 맡기에 부족하자, 나라 사람들이 궁(宮)을 맞이하여 뒤를 이어 왕위에 앉게 하였다. 왕은 태어나자마자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註 005 어려서 조숙하여 뛰어났다. 〔즉위할 때의〕 나이가 일곱 살이어서 태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_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편
그런데 태조왕은 막래 그러니까 모본왕의 먼 후손이 맞기는 한걸까
맞다면 왜 삼국사기에는 모본왕은 폭군으로 적혀있고
모본왕이 한 동부여 정벌의 업적은 왜 무휼(=여율)에게로 돌아갔는가?
모본왕에서 태조왕 사이의 삭제된 여러 명의 왕들. 이들은 혹시 소노부의 왕들이 아니었을까?
모본왕은 계루부의 왕인가? 소노부의 왕인가?
모본왕이 소노부의 왕이고 태조왕은 계루부의 왕이라면
소노부의 왕 모본이 죽자 모본의 아들인 소노부의 태자가 고구려 연맹의 왕이 되야했으나 계루부의 공격으로 패하여
계루부 왕 궁宮이 고구려 연맹의 왕이 된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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